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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ㆍ칼럼

[사람사는 풍경] 여수 두문포 2박3일, 눈에 밟히고 삼삼한



경쾌하고 아름다운 비행. 여수 앞바다 한려수도 해상공원의 갈매기들은 유람선 승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캐치하는 지점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이 역동의 순간은 제비가 날렵하게 호수 위를 스치며 먹잇감을 낚아챈 후 급상승하는 연비파문(燕飛波紋)의 형국이었다. 영화 '갈매기의 꿈'에 삽입된 닐 다이아몬드의 곡 'Be'가 떠올랐다. 여수 바다의 갈매기들도 '들리지 않는 소리를 찾아가는 노래'를 부르고 스스로 '무한한 자유'가 되려 비상하는 것일까. 

바순 음 같은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출항한 지 10여 분, 시야에서 제법 멀어진 오동도에서 날아온 동백 꽃잎 한 장이 파도에 살포시 내려앉아 넘실거리는가 싶었다. 

법정 스님이 타계하기 불과 하루 전 해남 미황사 금강 스님이 동백과 매화를 보냈다. 법정 스님은 매우 행복한 표정으로 "올라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꽃잎들을 하나씩 매만지고 다음날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생전의 신영복 선생은 월정사 현기 스님으로부터 "선생님 달 보내드립니다. 받으세요"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름다운 달빛을 혼자 만끽하는 게 너무 아까웠을 게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마침 친구로부터 '초청장'도 받았겠다, 내친김에 달빛 아래 꽃잎 띄운 막걸리잔 기울이는 장면을 상상하며 전남 여수 돌산읍 두문포로 내달렸다. 2박3일이 그렇게 시작됐다. 

짐을 풀고나서 대접받은 저녁 상차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정성이 한 상이라. 손끝 맛이 전해지는 먹거리에 그저 고맙고 미안하고 황송하고…. 평소 안주 안 먹기로 소문 난 나도 젓가락 질을 부지런히 할 수밖에 없었다. 

6㎏ 짜리를 요리해 살점이 통통한 삼치, 노릿노릿한 민어 구이, 굴전이 입을 즐겁게 만들었다. 꽃잎 띄운 막걸리에 곁들인 구수한 정담은 또 어떻고…. 격렬한 널뛰기를 반복하던 생각 터가 다소 안정을 찾았다. 

구름이 많고 미세먼지가 나쁜 날씨여서 달은 볼 수 없었지만 취기 오른 눈으로 바라본 두문리 포구는 마냥 평화로웠다. 얼콰해진 두 사내의 그림자가 밤의 정지 화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정박해놓은 고깃배에서 튀어나온 야생 고양이 한 마리가 안내라도 하는 것처럼 느릿느릿 우리 앞길을 놓았다.



이튿날 오전에는 향일암(向日庵)을 찾았다. 30분 정도의 해안 드라이브 후 고개를 들면 산 정상에 우뚝 모습을 드러내는 암자로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 중 한 곳으로 불린다. 

매표소를 지난 급경사 골목 양편으로 이곳 명물인 갓김치를 파는 아낙들이 "맛이나 보고 가라"고 외치고 왼편 바다에는 홍합 양식장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부딪혀 형성된 틈 사이를 통과하면 대웅전, 관음전 같은 절집이 몇 채 나오는데 도저히 공간이 없어보이는 산 꼭대기에 터를 잡은 가람 배치가 절묘했다. 

'첫 새벽'이라는 이름답게 우리나라 선불교의 시작을 알린 원효 대사가 659년 창건한 이 절은 수령이 오래 된 동백나무가 많고 일출과 바다 전경이 빼어나 일년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날 눈으로 확인했다.

3·1절 연휴를 맞은 여수 시내 오동도도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해양을 내려다보는 이색 체험을 선사하는 케이블카를 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 주차시킬 곳을 못 찾은 승용차들로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버린 시가지…. 인구 29만의 도시에 한 해 관광객이 1000만 명이 훨씬 넘게 찾아와(정부 집계) 주말이면 체증으로 고통받는 현지 주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쯤되면 전국 1위의 관광도시가 제주, 부산, 속초가 아니라 여수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지난 1일 오동도 동백숲길 구경에 나섰던 우리도 꽉 막힌 도로에 질식할 것 같아 해상공원 앞 고소동에 있는 벽화마을로 방향을 틀었다. 

반면 친구 집이 있는 두문포는 슈퍼 한 곳 없는 한적한 포구로 슬로 라이프를 원하는 사람에게 제격일 듯 싶었다. 생각이 깊은 한 시인이 일탈을 꿈꾸 듯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여기 장기 투숙할 수는 없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1일 밤에는 쥐 죽은 듯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껏 삼창했다. 

동백꽃의 유혹으로 시작된 여행 길, 언제 다시 올지 장담은 못 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재방문을 약속했다. 마지막 날 "떠나면 많이 쓸쓸할 것 같다"는 친구 아내의 말에 속마음을 숨기고 "원래 이별 때 떠나는 사람보다 보내는 사람이 더 쓸쓸해지는 법"이라고 능청을 떨었다. 풍경은 아직도 삼삼하고 다정한 얼굴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 Neil Diamond - Be. 영상=유튜브


[김홍조 시인]

한국경제신문 편집부 기자로 오래 일하고 
2009년 계간 '시에'를 통해 시인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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