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경제뉴스 이유린 기자] “리모컨 어딨어?”
사무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찾았던 건 한 잔의 냉수, 그리고 에어컨 리모컨이었다. 족히 20분 이상은 걸어서였을까.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땀을 식히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에어컨 리모컨은 생각보다 쉬이 눈에 띄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단 하루의 휴식 없이 여름 내내 혹사당한 뒤였으니 자기도 어디론가 숨어들고 싶었겠지. 당장 노동법에도 위배될 일이었다.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두가 주 52시간 근무에 익숙해진 시기 아니든가. 그런 사람들을 보며 살았으니 에어컨 리모컨에게도 그 언저리의 근무시간을 보장해 주었어야 할 일이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다들 알겠지만 이번 여름은 잔혹과 공포로 점철된 나날의 연속이었다. 덥다 덥다 해도 그리 더울 수가 없던 계절. 혹자는 기후온난화의 저주라고 했다. 무분별하게 에어컨을 돌려 탄소를 뿜뿜 뿜어낸 업보라고도 했다. 그렇게 여름은 우리에게 지옥에서나 발견될 화염지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치러야 할 대가임을 모르진 않는다. 그래도 예전과는 달리 기후위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그나마 다행일 터다. 여름은 여름이니 이해한다. 근데 지금은 여름이 아니지 않은가. 정확하게 말하면 9월 30일, 내일이면 완연한 가을이 시작되는 10월의 하루 전이었다.
최고 기온이 얼마였더라. 27도, 28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단 20여분의 도보에도 등허리에 땀이 맺히는 수준이었다는 것. 비상식, 그랬다. 상식적으로는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알던 상식이 의미가 무의미해지고 있다. 우리가 알던 가을, ‘10월의 어느 멋진 날’은 노래에서나 찾을 일이 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 늘어난 여름, 그만큼 줄어든 가을
지구온난화의 공포를 가장 현실적으로 체감하는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이런 순간이 아닐까. 뚜렷한 사계절을 자랑하던, 그래서 그를 자랑으로 여기던 한국인들의 인식이 무너져가는 이런 순간만큼 더 지구온난화가 무섭게 여겨지는 순간은 없다.
단순한 체감이 아니다. 기상청 분석에 따르면, 최근 30년간 한국의 여름은 20일 길어지고, 겨울은 22일 짧아졌다. 봄은 17일, 여름은 11일 빨라졌고, 가을은 9일 늦어졌다. 계절의 시작과 끝이 뒤틀리면서, 가을은 73일에서 69일로 줄어들었고, 겨울은 109일에서 87일로 축소됐다.
이마저도 몇 년전의 자료다. 모르긴 해도 올해를 기준으로 한다면 더 길어진 여름, 훨씬 더 짧아진 가을이 선명할 것이 분명하다. 당장 가을이 깊어가는 9월 30일의 최고 기온만 봐도 알 일이다. 이런 날시를 가을이라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우리가 아는 가을은 하늘 높고 말은 살찌는, 더불어 그 선선함에 돌아온 식욕을 주체 못한 인간들의 폭발적인 지방 증가가 뒤따라야 하는 시즌이다. 정말 그런가.
잠깐의 움직임에도 헐떡이는 숨결을 느껴야 하는 와중에 돋아날 식욕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
붉게 물든 단풍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제대로 물든 감이 까치밥으로의 변신을 기다리는 가을은 더 이상 없다. 가을이 사라지고 있다. 뉴스로만 보던 기후위기의 공포는 그렇게 우리의 계절을 앗아가고 있다.
내일이면 시작되는 10월, 멋진 바리톤이 제격인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는 더할 나위 없이 공허하게 스피커를 타고 흐를 뿐이다.
계절은 흐릿해지고 예측은 무색해진다. 가을을 기다리며 촉촉하게 젖어가던 누군가의 감성은 뜨거워진 햇살 앞에 아이스크림 녹듯 흐물거리기만 한다.
넷제로(Net-Zero)는 더 이상 일부의 슬로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내가, 당신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완수해야할 최선의 가치, 탄소중립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숙제다. 이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을 잃어버fl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날로 넘쳐나던 계절, 우리가 익히 알던 그 가을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