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경제뉴스 손영남 기자] 탄소중립 시대의 핵심 에너지원으로 떠오른 수소를 향한 전 세계의 대응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최근 미국의 한 발표가 파장을 확산시키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온실가스 배출을 최대한 억제하는 방향으로 수소 생산을 천명하고 있음에도 미국은 그를 외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탄소중립 기조를 거스르는 움직임이라는 비판도 동시에 나오고 있다. 특히 수소를 통해 화석연료 의존을 줄이고, 미래 에너지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우리 입장에서는 이것이 시대역행적인 움직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2040년까지 최종 에너지의 15%를 수소로 충당하고, 에너지 자립도를 23%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운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만 현재 한국의 대응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역시 엄연히 존재한다. 현실을 외면한 정책이 오히려 목표 달성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목소리가 그것이다.
◆ 현 에너지 체제 안에서 실현가능한 접근 채택한 미국
한국의 수소 경제 전략에 대해 회의적 시선을 보이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줄 주장이 최근 등장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이 지난 8월 4일 발표한 2025년 연례 에너지 전망(AEO2025)이 그것이다.
수소경제의 실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받은 당 보고서를 확인하면 현재 우리의 전략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수소 생산량은 2024년 대비 2050년까지 약 80%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대부분은 천연가스를 활용한 증기 메탄 개질(SMR) 방식으로 생산될 전망이다.
가장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재생에너지를 활용한 전기분해 방식은 전체 공급의 1% 미만에 그칠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기술적 제약과 경제성 부족, 인프라 미비 등 현실적인 한계를 반영한 결과다. 이 분석이 보여주는 의미는 명확하다. 미국은 수소를 이상적인 청정에너지로 포장하기보다는 기존 에너지 체제 안에서 실현 가능한 방식으로의 접근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근거도 다수 제기되고 있다. EIA는 이번 전망에서 수소 시장을 보다 정밀하게 분석하기 위해 새로운 수소 시장 모듈(HMM)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시나리오에 따른 수소 공급량과 기술별 기여도를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재생 가능 에너지를 활용한 전기분해 방식은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45V 청정 수소 생산 세금 공제에도 불구하고 전체 공급의 1% 미만에 그칠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경제성과 인프라 측면에서 기존 천연가스 기반 기술에 비해 경쟁력이 낮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2050년까지 미국 시장에 공급될 수소는 약 1,430만 미터톤(MMmt)으로, 전체 에너지 공급의 약 2.5%에 해당한다. 이 중 약 1,200만 미터톤 이상이 SMR 방식으로 생산될 것으로 보이며, 에탄 분해나 프로판 탈수소화 등 산업 공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 수소가 그 다음으로 큰 공급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SMR에 탄소 포집 및 저장(CCS)을 병행하는 방식은 2030년대에 최대 200만 미터톤까지 공급될 수 있지만, 관련 세금 공제가 2045년 이후 종료됨에 따라 장기적으로는 기여도가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EIA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통해 수소 시장의 변화를 예측했다. 석유 및 가스 공급이 부족한 경우에는 천연가스 가격 상승으로 인해 SMR 기술의 경제성이 낮아지면서 수소 생산량이 감소하고, 반대로 거시경제가 고성장하는 경우에는 벌크 화학 산업의 확대로 인해 수소 수요가 크게 증가하며 2050년에는 공급량이 1,550만 미터톤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운송 부문에서는 정책의 유무에 따라 수소 수요가 크게 달라진다. 정책이 시행되지 않으면 수소 연료전지 차량의 도입이 저조해지고, 수소 소비는 사실상 정체된다. 이처럼 미국은 수소경제의 확장을 천연가스 기반 기술에 현실적으로 기대고 있으며, 재생에너지 기반 수소 생산은 기술적·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제한적인 역할에 머물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은 셈이다.
◆ 한국의 수소경제 전략, 현실에 부합하는가?
EIA의 이번 발표가 한국의 수소경제 전략을 되씹어볼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2040년까지 전체 에너지 소비의 15%를 수소로 충당하고, 에너지 자립도를 23%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 달성이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냐는 시각이 적지 않았음을 고려해본다면 미국의 이번 발표를 냉정하게 검토할 필요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이미 여러 루트를 통해 확인된 것처럼 정부는 수소발전의무화제도(HPS) 도입, 액화수소 플랜트 구축, 청정수소 인증제 확대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며 수소경제 활성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기대만큼의 즉효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기술 개발과 인프라 확충 시도만으로는 수소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최근 산업 구조 자체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25년 1월, 국회에 발의된 ‘수소 및 수소화합물 사업법’ 제정안은 수소 산업을 전기·석유·도시가스처럼 독립적인 에너지 산업으로 규율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 법안은 수소 사업에 대한 인허가 체계를 도입하고, 배관 및 인수기지 인프라의 공동 이용을 의무화함으로써 공정 경쟁 환경을 조성하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자는 5개년 공급계획을 제출해야 하며,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수급 예측과 비축 정책을 수립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수소 거래소 지정 가능성을 열어두며, 수소 산업의 시장 기반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려는 시도도 담고 있다. 다만 일부 조항은 최대 5년까지 시행이 유예될 수 있어, 법안의 실질적 효과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제도적 정비는 수소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데 필수적이지만, 기술 상용화와 수요 창출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정책의 실효성은 제한적일 수 있다.
여전히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린수소의 생산 단가는 여전히 높고, 블루수소는 국내에 적절한 탄소 저장 인프라가 부족하다. 수소차 보급과 충전소 확충도 목표에 크게 못 미치고 있으며, 핵심 기술의 상용화는 지연되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수소경제가 기술적 이상에 치우쳐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투자자들은 정책 불확실성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수소경제가 기술적 이상이 아닌, 에너지 체제의 현실적 연장선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 이번 EIA의 발표는 그런 심증을 한층 더 강화시킬 수 있다. 일정 부분 현실과 이상을 양립시켜야 할 필요성 역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 우리의 행보를 멈춰야 할 이유는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수소는 포기할 수 없는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철강, 화학, 발전 등 고온·고압 공정에서는 수소가 거의 유일한 탈탄소 수단이며, 대형 운송 수단에서도 배터리보다 유리한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고체탄소만 배출하는 청록수소 방식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며, 산업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지금으로선 정책의 방향 전환보다는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안 강구에 주력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에너지 전환의 수단으로서의 수소 경제는 포기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되는 지상 과제다. 제도 정비와 기술 혁신, 그리고 민관 협력 모델이 균형 있게 작동할 때, 수소경제는 단순한 미래 구상이 아닌 현실적 에너지 체제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