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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ㆍ칼럼

[유태준 문화시계] ③ 이완용, 일본말을 몰랐던 친일파

독립문 현판 쓰고 일본에 나라 팔아 먹어


경쟁과 강자(强者)를 우선시 하는 사람들은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본인들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다. 또 경쟁을 통해서 사회가 발전한다고도 한다. 맞는지 틀리는 지는 오랜 논란거리다. 

하지만 분명한 건 경쟁에는 패배하는 사람이 나오고, 강자는 반드시 군림할 약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패배자와 약자는 대부분 힘들고 아프다.

우리 역사에도 권력을 쫓아다니며 민족과 백성을 힘들고 아프게 한 인물들이 적지 않다. 

이완용,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대한민국에 없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등이 있는데 간단하게 '매국노'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매국노'의 아이콘이 된 인물이다.

■ 미국에서 러시아, 그리고 일본. 다시 미국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의 대표 이완용은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그는 일본인과 만날 때 항상 통역을 데리고 다닌 것으로 전한다. 그가 일본어를 못한 이유는 젊은 시절에 영국을 우러러 봤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그는 학생 시절,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이었던 영국을 선망해서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것으로 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영어에 능통하게 돼 1888년 대한제국의 초대 주미공사관으로 미국행을 한다. 

그의 당초 바램인 영국은 아니었지만 주미 한국대사로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자본주의와 민주공화제에 충격적인 감화를 받았고 우리나라에 의무교육제도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친미파가 됐지만 귀국 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러시아에 친밀감을 보이며 그들을 우대하자 즉시 러시아 쪽으로 몸을 돌리고 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하지만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그는 또 재빠르게 패권을 잡은 일본으로 돌아섰고 친러파였던 자신의 경력을 만회하기 위해서였는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매국행위에 앞장섰다.

이후 20 여 년간 친일파로 살아 온 그는 1926년 69세의 나이로 사망 할 때는 자식들에게 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앞으로 미국이 흥할 것 같으니 너희들은 미국에 기대어라”

■ 힘과 권력 따라 몸바꾸기...질곡의 인생

이렇게 변화무쌍한 삶을 살다보니 당연히 인생 여정에도 많은 질곡을 겪었다. 

을사조약을 이끌고 고종황제를 폐위하면서 이재명 의사(義士)에게 칼을 맞아 죽을 고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회생하기도 하고, 이후에도 수 많은 암살 위협에 시달려 정상적인 삶이 어려웠던 것으로 전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나라와 백성을 팔아 먹은 도적놈'이라는 시선을 보냈고 가족들은 물론 후손들까지도 편안한 삶을 살지 못했다. 

가정사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아들의 아내 즉, 며느리와 간통을 일삼아 그 사실을 알게 된 첫째 아들은 충격을 받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들은 숨을 거두기 전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했는데 살아서 무었하리”라며 한탄했던 것으로 전한다.

그의 행적 중 또 하나 놀랄만한 일은 그가 독립협회 2대 회장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 상단의 현판 ‘독립문’은 그가 직접 쓴 친필이라는 기록이 얼마전 발견됐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사대사상 배척과 자주독립의 기치를 올리며 중국사신을 맞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했다. 

독립문 건축을 위해 개화파들을 주축으로 '독립문 건축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독립협회도 발족했는데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사람이 이완용이다. 당시 협회의 운영을 위해 모금한 후원금 510원 중 100원을 이완용이 희사한 것으로 전한다. 물심양면으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뛰어 다닌 셈이다.

이런 이완용의 뜨거운(?) 자주독립 행적으로 독립신문 11월 11일자 논설에는 이완용을 대한제국의 몇 안돼는 재상 중 하나라는 칭송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일본에 납짝 엎드려 민족의 자주권과 백성들의 안녕을 일본에 떠 넘기고 온 나라를 실망과 분노에 휩싸이게 했다.

이완용이 독립문 현판을 썼다는 것을 꼬집는 언론의 내용이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는데, 이 기사를 통해 독립문 현판에 얽힌 사연과 당시 국민들이 이완용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 지를 엿볼 수 있다.

당시 동아일보는 "교북동 큰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 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 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며 비아냥 거렸다. 일제치하에서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겠지만 이완용에 대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 강자보다 약자를 먼저 배려하는 세상으로

그 당시 이완용이 그랬듯 100년이 지난 지금도 강자 우선의 논리를 삶의 원칙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 

이완용이 그랬듯 권력을 쫓아 이리 저리 거취를 옮기고, 한 때 약자의 편에서 목소리를 높이더니 지위가 오르자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휭포를 저지르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최근들어서 우리 국민들의 의식속에, 그런 강자의 논리보다 함께 나누고 약자를 먼저 배려하는 마음들이 커져 가고 있는 걸 느낀다. 

여성과 위안부 할머니, 비정규직과 장애인, 경비원 아저씨와 알바 청년들까지...그동안 힘의 논리에 치여 외면됐거나 홀대 받았던 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선듯 손을 내밀었다는 소식을 자주 듣는다.

지난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도 우리 국민들은 예전과 달리, 금메달만이 아닌 은메달과 동메달을 딴 선수들에게도 큰 환호를 보냈고 예선에서 떨어진 선수들에게도 그들의 땀과 눈물에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경쟁은 있었지만 패배자는 없었다.

3월을 맞아, 학생 시절에 제대로 불러 보지 못한 3.1절 노래를 찾아 본다. 강자만 쫓아다니는 이완용 무리들을 엄히 꾸짖었던, 대다수 약자들이 만들어 낸 역사를 다시 가슴에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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